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[1월 93호] 계룡문고 김용기 차장의 서재
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보아온 책이 숨 쉴 틈 없이 꽂혀 있는 서재, 그런데도 묘하게 여유를 풍기는 서재, 어느새 이 사람 자체가 되어버린 것 같은 소박하고 정갈한, 계룡문고 김용기 차장과 그의 서재를 만났다.
이중 책장을 마련하던 날, 세상 전부를 가진 것 같았다. 초등학교 6학년 때 처음 아버지께서 사주신 세계문학 전집부터 가장 최근에 산 책까지 버리는 것 하나 없이 집에 쌓아두었다. 책 한 권을 집으로 가지고 오는 날이면, 두 권을 가져다 버려야 한다며 으름장을 놓던 아내도 포기한 듯했다. 책장이 부족해 틈만 있으면 책을 두었다. 어느새 사람이 사용하는 공간보다 책이 사용하는 공간이 더 많아졌다. 그러다 5년 전 즈음 이중 책장을 마련했다. 책장을 사들이고 설치할 때, 벽 한 면을 가득 채운 빈 책장을 바라볼 때, 그곳에 하나둘 책을 꽂아놓을 때, 세상 모두가 다 내 것인 것 마냥 느껴졌다.
이사할 때도 가장 먼저 옮기는 건 책장이었다. 5년 전 책장을 마련하고 딱 한 번 이사했다. 이삿짐센터에서 집으로 오기 전에 책부터 꺼내 두었다. 책꽂이 한 칸에 든 책을 꺼내면 한 묶음이 된다. 그렇게 책은 묶음으로 두고, 사람보다 먼저 책장이 새집으로 갔다. 책장 설치하는 날을 정하고, 비로소 가족이 함께 이사하는 날을 정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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김용기 차장이 무덤까지 가지고 가고 싶다며 고른 책
아주 어릴 때 시골에 살았기 때문에 책이 귀했어요. 아버지 친구분 중 출판사를 운영하는 분이 있었어요. 그분이 어느 날 우리 고향까지 내려와서 아버지와 술 한잔을 하며 세계문학 전집을 팔았던 거예요. 그때 아버지 월급의 몇 배나 하는 돈이었어요. 몇 개월 할부로 사셨는데, 수금하러 달마다 우리 동네까지 오시곤 하셨어요. 지금 생각하면 참 재미있는 풍경이었죠.
그게 처음으로 받은 책 선물이었어요. 정말 열심히 읽었어요. 항상 가방에 한 권씩 넣고 다니며 꼬박꼬박 챙겨 보니까 아버지께서 좋아하셨던 것 같아요. 세계문학 전집을 다 읽을 즈음에는 한국문학 전집을 사주셨어요. 그것도 다 읽었죠. 지금 보면 이걸 다 어떻게 읽었나 싶어요. 지금까지 한 권도 버리지 않고 그대로 가지고 있어요. 고등학교 때는 도서관을 맡았어요. 일주일에 몇 번씩 도서관에서 청소도 하고, 책 정리도 하고, 대출도 해주고, 그런 일을 하는 거였어요. 공부해야 했기 때문에 자주는 못 왔지만, 다른 친구들보다는 자주 오는 편이었죠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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대학도 국문학과를 갔다. 그때만 해도 학교는 학교가 아니었다. 매일같이 데모였다. 그때는 도서관에서 장준하 선생의 『사상계지 수난사』, 『민족주의자의 길』 등을 읽었다. 지금 내가 사는 이 시대가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지, 알고 싶었다. 그 전까지는 잘 알지 못했다. 충격도 받았고, 고민도 많았다. 하지만 현실이 고달팠다. 학비를 낼 형편이 되지 못해서 대학을 마치지 못했다.
낮에는 학원에서 일하고, 밤에는 공부하며 지내다 서점 일자리를 소개받았다. 1988년이었다. 대구에 있는 한 서점이었는데, 아침 9시에 문을 열어서 밤 10시까지 근무했다. 한 달에 22만 원을 받으며 일했다. 그때 물가를 따져봐도 적은 돈이었다. 그래도 즐거웠다. 책을 좋아했던 게 도움이 됐다. 전자시스템이 발달하지 않은 때였다. 손님이 와서 책 정보를 물으면, 손님과 함께 이야기하는 재미가 있었다. 그때는 작은 서점 하나 하는 게 꿈이기도 했다. 1997년인가 1998년에 인터넷 서점이 나오면서는 그 꿈을 일찌감치 접었다. 이제는 내가 모은 책만 가지고 동네에서 마음 맞는 사람들과 함께 공간을 마련하고 싶다. 책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‘사랑방’을 만들고 싶은 바람이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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창문 아래 공간 역시 책이 자리잡았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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김용기 차장은 요즘도 카세트 플레이어로 음악을 듣는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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김용기 차장과 그가 좋아하는 소설가 조정래의 사진이 나란히 붙었다.
1993년도에 대전에 내려왔어요. 1988년부터 지금까지 서점에서 일한 거죠. 예전에는 책에 관심이 많은 사람만 서점에서 일할 수 있었어요. 정보가 많던 시절이 아니었잖아요. 책을 사러 오는 사람도 아주 작은 정보 하나만 가지고 서점에 왔거든요. 예를 들어서 어떤 소설가의 단편 소설 제목만 가지고 책을 찾으려고 하는 손님이 있었어요. 그 제목으로 책을 찾을 수 없었죠. 소설집에 수록된 단편 소설 한 편이었으니까요. 그럴 때마다 찾아주고, 이야기하는…. 그런 재미가 있었는데, 요즘은 기계가 다 알아서 해주니 서점에서 일한다고 특별히 더 책을 많이 아는 건 아니에요. 손님과 소통하고, 책에 관해 이야기하고, 그럴 때가 좋았던 것 같아요. 제 생각은 그래요. 지금 있는 책들이 일하며 큰 도움이 된 책들이죠.
어릴 때 산 책보다 일하며 산 책이 더 많아요. 어릴 땐 대부분 책을 빌려서 읽었으니까요. 대학 때 정말 사고 싶었던 책이 창작과 비평 계간지였는데, 돈이 없어서 사질 못 했어요. 얼마 전에 계룡문고 헌책 서점에서 발견했을 때는 어찌나 반가운지 소리를 지르고 싶었어요.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진다는 말을 그때 실감했어요. 왜 그렇게 책이 좋았는지 잘 모르겠어요. 어떤 목적을 가지고 읽었던 책은 거의 없었던 것 같아요. 훑어보다가 한 줄만 마음에 들어도 사요. 그렇게 해도 책 한 권에서 한 줄을 얻을 수 있는 거였어요. 다른 건 다 써버리면 없어지지만, 이 책들은 내가 죽기 전까지 버리지 않으면 언제라도 찾아서 다시 볼 수 있잖아요.
반가워서 괴성을 지르고 싶었던 책, 30년 전 처음 대학에 들어가 산 책, 아버지가 선물해준 첫 번째 책, 선물 받은 책, 무덤에도 가지고 가고 싶은 책, 한 줄이 마음에 들어 단숨에 읽어버린 책, 예전에 읽었던 것을 기억하고는 사놓고 모셔둔 책 등 김용기 차장의 서재에는 인생의 조각이 하나씩 꽂혀 있었다. 제발 가져다 버리라며 핀잔하는 가족도 결국에는 책과 함께 자랐다.
영혼을 조금씩 떼어다가 책갈피로 만들어 하나씩, 수천 권의 책에 넣어 두었다. 서재에서 꺼낸 책 한 권마다 조금씩 떼어놓은 그의 영혼이 한 줌씩 묻어 나왔다.
